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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N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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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붕괴와 역붕괴 기술 개론


  일반적인 환경에서 우리는 물질의 가장 안정된 상태를 고체 상태라고 여긴다. 물체의 분자결합은 고체 상태일 때 가장 견고하다. 그러나 미지 문명의 관점에서는, 고체 상태는 결코 보존에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니었다. 그들은 물질이 액체 상태일 때, 그 물질에 적용되는 물리법칙이 기본적인 법칙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초 이론 물리학으로 접근했을 때, 미지 문명의 미립자 통제 수준은 믿기 힘든 수준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거시적 세계 물질의 고도 압축으로 발현된다. 유적이 나타내는 기술은 고정합적인 복합성 체계로 각기 다른 연구 보고에서도 모두 유적 기술의 복잡성이 언급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연구는 유적 기술 체계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도출해낸 결론은 유적 기술은 '붕괴 기술'과 '역붕괴 기술'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붕괴 기술에 대해 설명하자면, 일단 분자벽을 하나의 벽돌 벽으로 생각하자, 외부에서 힘을 가해 이 벽을 무너뜨리면 벽돌들이 무질서하게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마치 흩어진 분자들처럼. 그리고 역붕괴 기술의 운동 과정은 떨어진 벽돌들이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 벽으로 재조립 되는 되감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분자들이 흩어진 상태에서 고속으로 움직여 각자의 인력 상태를 재조성하는 것이다. 


  미지 문명에서는 이 붕괴 기술이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모양이다, 전 세계 모든 유적에서 이 기술이 보고 되었기 때문이다. 분석에 의하면 이 미지 문명은 어떤 종류의 붕괴액을 사용해 물질의 척력을 내부에서 차단해(사실 '액'이라고 지칭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붕괴액은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일종의 입자파로, 물질을 고속으로 관통한 후 양자 얽힘으로 나타난다. 이 관통 과정의 복사 주파수는 높으며 구성 성분이 다르고 바닥 쿼크와 광자뿐인 것을 관측할 수 있다.)[각주:1] 배열을 약화시켜 물질의 구성 분자를 차례대로 붕괴시키며 인척력의 뒤집힘을 이용해 원래의 분자 공간을 압축해 양자화시킨다. 이때 저장 장치가 역붕괴에 사용하기 위해 분자의 원래 배열 방식을 기록한다.[각주:2] 이로써 붕괴의 작업은 끝을 맺는다. 이 작업은 인류가 이해 가능한 범위 내이며 동시에 현재 제일 많이 사용되는 붕괴 기술이다.


  붕괴 기술을 이해하였으면 역붕괴 기술의 이해도 어렵지 않다. 전자원의 회절을 차단시킨 뒤 컴퓨터가 물질 생성 공간 모형 구조를 도입한다, 붕괴액이 물질의 압축 상태를 해제시켜 분자의 진동을 이끌어 내고 붕괴 물질이 같은 주파수의 광자를 흡수한 후 내부 구조에서 대량의 전자가 고 에너지인으로 천이하게 된다, 이 과정의 에너지 전달이 고온을 발생시키고 물질은 활동적인 유동적 상태로 변하며(말했다시피 액체가 아니다) 물질 생성 모형에 따라 배열을 재구성하여 인척력을 회복한다, 완료된 후 회절 제한을 해제시키면 역붕괴 작업은 끝이 난다. 


  그러나 현재 인류의 유적 기술 연구가 계속 정체되어 있어 가장 기본적인 붕괴 기술조차 장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예를 들자면,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여 병사들에게 더 좋은 무기를 쥐여 줄 수 있다 하더라도 물질이 원자·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영원히 위성과 미사일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와 유적 기술의 현재 상황이다.


  보고에 의하면, 각기 다른 유적이 나타내는 기술의 형식 역시 차이를 보였다, 1992년 UN 유적 과학 부서가 설립되기 이전 각국의 유적 기술에 대한 연구는 공통적으로 전면성이 부족했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대규모의 유적 관측이 실행된 바가 있었지만 당시의 과학력으로는 붕괴 기술의 핵심 기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로 40년 동안은 초강대국이라도 그저 현재 존재하는 방식을 억지로 적용시켜 불완전한 무기를 만들어낼 뿐이었다. 미시 물리학이 발달되기 이전의 인류는 붕괴 기술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붕괴 기술의 이상적인 사용법이라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붕괴 기술의 진정한 위험은 거시적 세계의 운동 방식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는 것에 있다. 붕괴 기술은 미시와 거시 사이에 다리를 놓아서 이 다리를 통해 물질이 어떠한 형식의 분해와 재구성도 가능하게 하며, 심지어 원거리 전송 같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기술도 가능하게 한다[각주:3].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초 물리학을 완전히 뒤집는 이 붕괴 기술을 어려워한다.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역붕괴 기술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 역붕괴 기술은 이미 현재 과학의 상상력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2. 근대 유적 연구와 GAVIRUL 재현 계획


  소련과 미국에서 있었던, 유적 기술을 둘러싼 일련의 서투른 연구와 실험이 야기한 사고 이후[각주:4], 세계는 유적기술의 경이에서 눈을 돌려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유적의 모든 기술의 분석을 시도하기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미지문명을 연구하는 방식이 점차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세기 60년대 중국 상하이 북란도 유적(제27 호 甲등급 기술연구기지)에서 발굴한 온전한 미지 생명 사체가 유적문명을 창조하는 지혜의 하나라 인식되었고, 추측에 따르면 이 생명체는 미지문명 유적의 경비원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유일한 샘플은 'GAVIRUL'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중문 학명은 '위(尉)'라 붙었다.


  GAVIRUL이 보관된 뒤, 발굴된 북란도 유적엔 다른 유용한 연구가치가 없었기에 지하 67미터 아래에서 발굴이 끝나고 얼마안되서 봉인되었고, 12년 후 도시 발전을 위해 북란도 유적 입구는 철저히 막히게 되었으며, 새로운 건물이 그 위로 들어섰다. 이후 GAVIRUL은 장장 30년에 걸쳐서 잊혀지게 되고 1992년 UN 유적과학부서가 설립된 이후에 GAVIRUL의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의 논쟁과 정치적 견제가 있은 뒤, GAVIRUL 재현 계획이 수면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GAVIRUL 재현 계획은 처음부터 혼란스럽고 지도가 결핍되어 있었다. 정치적인 고려를 제외하고 과학부서 내의 생물 전문가 역시 2개 파로 나뉘었다. 하나는 GAVIRUL 재현 계획이 유적을 재가동 시키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파였으며, 유적이 활성화 된 이후 유적에 대해 철저히 학습 및 복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하나는 일단 유적의 발굴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고, 주요 자금과 연구개발 사업을 태아 본체의 인류화 계획에 투자함으로써 미지문명의 위험성을 이해하는 교량 역할을 해야 했다. 불안정한 세계 판도에 힘입어 후자의 주장이 광범위한 동의을 얻어, GAVIRUL의 유전자에 의한 탄생을 촉진하는 인류 태아 그룹 육성 계획 역시 곧바로 시작되었다. 유전자의 불안정성 때문에 배아 사망률은 매우 높았고 (사망률은 약 98.9%),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건 겨우 둘 뿐이었다. 유전자 염색체을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 모든 태아는 여성이며, 난자는 모두 다른 점에 따라 살아남은 두 개체에게 각각 코카서스 인종과 몽골 인종의 외형 차이가 생겨났다. 관찰 계획 일련번호에 따라, 코카서스 인종의 특징을 가진 여성은 G-37 관찰 대상, 몽골 인종 외모가 특징인 여성은 G-114 관찰 대상이며, 이 중 G-37은 유전자 결함에 따라 머리가 하얀색이며, G-114는 정상적으로 흑발이었다. 그 외, G-37, G-114관찰 대상은 유아 단계에서 보통 사람과 어떠한 구분이 없었다. 이 특별한 현상에 근거해, 연구원장은 G-37, G-114의 연구관찰 계획을 "흑백합과 백장미(Black lily & White rose)" 라 명명하고, 두 자매의 코드명을 "릴리"와 "로즈"라 정했다[각주:5].


  관찰 대상은 빠르게 성장했고, 신진대사가 보통인에 비해 반절은 많았기에, 7살이 됐을 때 이미 정상인의 14세 전후의 외모의 특징을 보였다. 계획이 진행된 지 15년이 됐을 때, 각 항목의 테스트에 따르면, 근육 강도와 전두엽 피질의 활동도가 동 연령의 보통 사람에 비해 높은 것을 제외하면 다를 게 없었고, 릴리와 로즈 둘 다 보통과 다른 점이 없었고, 유적 물질과의 어떠한 면에의 반응도 발생하지 않았다. 관찰이 20년이 경과한 뒤, GAVIRUL 계획은 실패 선고를 받았다. 이 때문에 유적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를 진행하자는 요구가 다시금 심해져 갔다. 태아 샘플과 기록 문서가 모두 보존된 이후, 본래 '흑백합과 백장미'계획에 지급되었던 모든 자금은 같은 유적 관련 기술인 '부중자 (負重者, Weight Bearer)'라는 소형 강화외골격 시스템의 연구제작 사업으로 들어갔다.[각주:6] 그리고 이 시스템은 이후 '강총병 (强銃兵, Assault Artillery)'이라는 전투 플랫폼의 토대가 되었다.[각주:7] 전쟁 발발 후 자료가 소실되어, 우리는 더 이상 릴리와 로즈의 행적을 소상히 알아낼 수 없었다. 자잘한 기록보고에 나타난 것에 따르면, 신분의 특수성 때문에 그녀들이 이후 비밀리에 대 ELID 작전에 참가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시간은 제1 차 북란도 사건 발생 전야다. 정보가 너무 적은 탓에 그녀들의 행동과 북란도 사건에 직접 혹은 간접적인 관련이 있는지 알 방법은 없다.


3. 제1 차 북란도 사건


  제1 차 북란도 사건은 유적의 위기와 그 대처라는 측면에서 처음으로 겪은 실패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세계를 철저하게 바꾸어 놓았다. 여러 해 전 상하이 시 북란도의 도시 개발 공사 도중, 건설현장의 굴착기가 유적의 외벽을 파손하면서 소량의 붕괴액이 크리스탈 캡슐에서 새어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방출된 입자는 지표상의 인간에게 광역성저복사감염증 (ELID) 을 유발했다. 상하이 시는 ELID를 다루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태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중앙에 대한 통보 없이 오염지구를 격리하고 주민들을 소개시키는 것으로 만족했다. ELID의 출현은 상하이 시내에 적지 않은 ELID 관련 강력범죄를 발생시켰고, 유적과 ELID를 전담하는 '특평경'[각주:8]이 이 일련의 사태에 개입하였다. 상황이 일단락된 후, 북란도 구는 격리되어 완전히 봉쇄되었다. 그러나 봉쇄의 강도는 사태가 진정됨에 따라 점차 낮아졌다. 사건 발생 15개월이 지난 후, 봉쇄 단계는 4급까지 내려갔다. 이러한 봉쇄와 감시의 약화는 심각한 헛점이 되어 북란도 사건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고 만다.


  2030년 제1 차 북란도 사건은 일곱 명의 중학생이 허가 없이 봉쇄구역에 들어가 ELID 감염자의 공격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다. 경찰 사양 AA-03D를 장비한 특평경 1개 파견소대 네 명이 구조를 위해 봉쇄 지구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구조는 실패하였고, 소대는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AA-03D의 외부 카메라가 보내온 마지막 영상에 따르면,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은 유적 내부에서, 구조대원은 유적 입구를 폭파하여 무너뜨리는 것으로 유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실패하였다. 폭발로 인해 유적 외벽이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붕괴액이 완전히 누출되었다. 대량의 붕괴액이 응축되어 고밀도의 입자중합을 유발, 순간적으로 고열을 뿜어냈고, 이것이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분사된 붕괴입자는 시를 순식간에 완전히 쓸어버렸다. 대류권으로 진입한 붕괴입자 구름은 온 나라로 퍼져 나갔고, 이윽고 무역풍을 타고 몇 개월만에 세계 각지로 확산되었다. 입자 구름으로 뒤덮인 지역은 곧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렇지 않은 지역 또한 광역성저복사감염증의 폭발적인 발생으로 인구가 급감하여, 인류의 거주에 적합한 지역은 점차 감소하였다. 백 년에 걸친 유기생물의 절멸기가 도래한 것이다. 15년 동안 각국은 붕괴입자 문제의 해결법을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최종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붕괴입자가 인체에 닿아도 될 만큼 감쇠되려면 10만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각국의 서로에 대한 질책과 불신은 그 정도를 더해 갔다. 이 불안한 균열을 메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2045년, 인류에게 허락된 마지막 땅들을 지키고 빼앗기 위해 제3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4. 제 3차 세계 대전과 남극 독립


  제3 차 세계 대전은 2045년 4월 5일에 발발하여 2051년 6월 29일에 종전하였다.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토지의 쟁탈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핵무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 펼쳐진 재래식 전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과학기술이 초래한 고강도의 전쟁은 그렇지 않아도 줄어든 인구를 한층 더 격감시켰다. 많은 비감염지대가 전쟁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대전쟁이 발발하고 6년, 전세계에서 정규군 1천여 부대 규모의 병력이 소멸되었다. 각국에는 더이상 대전투를 벌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중국, 미국, 러시아 등 살아남은 국가들은 전투를 중지하고 회담에 들어갔고, 각국이 상호 제한 조약에 서명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은 그대로였다. 살아남은 국가들은 영토범위를 축소하고 중공업지대를 이전하는 등,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고 힘을 비축하며 훗날을 도모하였다. 10년 후, 여전히 각국은 민생 수습과 국가 재건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한 나라의 힘으로는 더이상 인류의 미래를 지탱하는 과업을 짊어질 방법이 없었다. 루크사트주의[각주:9]가 발흥하여 세계적으로 공인된 가치관이 되었다. 2062년 UN이 재설립되었고, 2년 후에는 연합 정부인 루크사트주의 합중국 연맹 (루련)이 탄생하여,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제1 차 북란도 사건 이전인 2023년, 남극의 빙반 아래 거대 공동에서 미지의 문명과 함께 현존 최대 규모의 유적 시스템이 발견되었다. UN 유적과학부서의 역량은 그 전신에 비해서 굉장히 뒤떨어졌지만, 각 분야별 최고수준의 과학자들과 거액의 민간 투자를 받아 남극 유적의 발굴과 연구, 측량을 빠르게 개시하였다. 요나스 박사와 리 데밍 박사가 프로젝트를 공동 지휘하였다. 지저공동이라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관측과 측량 작업 도중 ELID에 대해 지표상에서와 같은 걱정은 없었다. 탐사에 참여한 모든 작업자는 항 ELID 유전자 개량 시술을 받는 것에 동의했고, 최신형 부중자 시스템을 장비하였다. 이후 10년간 리 데밍 박사는 안전한 탐사를 위해 반사벽과 공동 내 도시의 건설[각주:10]에 진력하였다. 공동 도시의 주민들에게 보이는 풍경은 기이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높이 21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유적의 문 뿐이었다. 그 동안 요나스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유적 기술에 대해 다방면으로 해독과 연구를 진행했다. 20년의 시간이 흐른 후, 연구는 마침내 첫 번째 돌파구를 맞이했다. 2047년 처음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 통제할 수 있는 역 붕괴 시설이 만들어졌다. 2년 후 역 붕괴 기술은 슈퍼컴퓨터에 응용되었고, 미시 물질 생성 모형의 계산이 가능해졌다. 2045년 제3 차 세계 대전이 터진 후, 자위 차원에서 남극은 즉시 공동 도시를 독립국가로 선포하고 철저한 중립을 지켰다. 중립 선언과 동시에 남극은 공동 도시의 모든 진입로를 폐쇄하고 20년 간 침묵하였다. 당시 세계 각국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남극의 유적 연구 작업은 위정자들의 뇌리에서 오랜 시간 잊혀졌다. 


  남극 유적에 대한 탐사가 개시된 해로부터, 루련이 유조선 사건[각주:11]으로 인해 남극과 다시 접촉할 때까지는 꼬박 50년이 걸렸다. 이 천금같은 50년을 이용하여 남극은 붕괴와 역 붕괴 기술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남극의 유적 기술에 대한 통제는 아직 성숙한 수준이 아니었지만, 루련과의 기술 격차는 이미 몇 세대를 훌쩍 넘는 수준이었다.[각주:12]


5. 10년의 밀월, 남극 연방 성립과 제1 차 남극 전쟁


  루련의 성립 후 세계 경제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기초 물리학과 유적 연구도 다시금 완만한 상향 곡선을 그렸다. 유조선 사건 이후 루련과 남극은 다시 접촉하였고 새로이 국교를 맺었다. 양측은 서로의 세계가 50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인도주의적 의도에서 남극은 이웃한 도시들의 인프라 구축을 원조하기 시작했다. 남극의 기술이 주변 도시들에 폭넓게 전파되었다. 10년 간의 남-루 밀월이 시작되었다.


  남극의 주변 투자규모가 커짐에 따라 주변 국가에 내륙국가와는 완전 다른 발달 풍경이 눈에 띄게 나타났고, 반동식 감쇠 장벽[각주:13]의 구축은 붕괴입자 구름의 구역을 점점 줄여나갔으며, 인류 생존의 역경이 드디어 일부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념의 차이[각주:14] 및 남극의 눈에 띄게 커져가는 기술 역량은 루련 내부에서 남극 위협론이 생겨나게 만들었고, 더불어 내륙 국가들의 남극 불신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처음의 남극에 대한 반대는 문화 영역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사는 곳의 환경 차이가 매우 컸고 남극인과 루련인의 세계관 및 가치관의 차이마저 컸으며, 다른 지역의 문화차이와 이념의 차이는 두 곳의 국민들이 점점 서로를 적대시 하게 만들었으며, 남극에 대한 강경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2078년, 남극 일대의 주변 국가들이 루련을 탈퇴하여 남극 진영으로 가입했으며, 이로써 남극 연맹이 성립하게 되었고, 남련의 성립은 루련의 모두의 남극에 대한 태도를 직접적으로 바꿔버렸으며, 남극위협론이 유행하게 되었다.


  남극은 평화의 제스처를 보내기 위해 주변의 남련 미가입 국가의 기술자 및 인원들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투자 및 쌍방 무역 행위가 대폭 감소했으며, 이는 루련이 남극이 이미 상당한 적의를 갖고 있다고 여기게 하였다. 루련은 '대 남극 제재 법안'[각주:15]을 통과시켰고, 이에 남극 정부는 큰 불만을 품었다. 남극 정부는 모든 동포들에게 남극으로 귀국할 것을 호소했고, 루련측은 이에 대해 "매우 어리석은 결정"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2089년 7월, 연변 국가에 남겨진 한 무리의 남극 청년들이 자신들의 거주구를 봉쇄하던 경찰들에게 돌을 던지는 일이 생겼고, 루련 경찰측은 이에 사격으로 대응을 하였다. 이에 도시 내의 남극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연변 국가에 체류하는 남극인들이 해당 지역의 급진파 세력과 같이 대규모의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루련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무력 개입을 결정하였다. 2089년 9월, 남극은 동포의 보호를 구실로 선제 공격을 개시했다. 암호명 '뱀 자르기' 작전. 제 1차 남극전쟁의 시작이었다.


  루련은 처음에는 남극의 선전 포고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고작해야 인구 3천만도 안 되는 국가가 큰 위협이 되지는 않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남극은 붕괴와 역붕괴 기술의 군사 실용화를 이미 수 년 전에 끝마쳤고, 완전히 새로운 작전방식으로 루련 군대를 첫 1년 동안 무참히 짓밟았다. 루련의 지휘관들은 곧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크게는 전략타격 방식에서 작게는 화력제어 레이더의 운용 정밀도까지, 남극의 모든 것들이 루련군보다 수 세대 앞서 있었으며, 남극군의 정보 연산 및 수집 속도는 루련보다 수 배는 빨랐다. 전세는 일방적이었다. 하늘에서는 AR.Cop. NB-90 물질왕복선[각주:16]이 제공권을 틀어쥐어, 루련의 항공화력을 얼씬도 못 하게 만들었다. 물질왕복선의 조기경보와 위치추적을 받은 남극의 다연장 저공미사일이 거의 순식간에 남극을 봉쇄하던 함대를 괴멸시킨 탓에, 다른 루련 함대는 모습을 드러내기조차 힘들었다. 고효율 자율분석시스템의 정보지원을 받은 소수의 보병이 '카트' 공중포격정과 협동하여, 자신들의 수백 배에 달하는 루련군을 마치 느긋하게 마트에서 쇼핑카트를 끌고 다니는 것마냥 간단하게 상대했다. 남극군의 병참 능력이 기나긴 해안선을 잠깐 봉쇄하는 것도 힘에 부칠 정도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남극 정부가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을 것이다. 루련은 대량의 장거리 탄도탄을 쏟아부어 남극의 각 중계기지를 무차별 공격하여 남극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남극 정부는 남극군에게 내륙 깊숙히 반격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루련은 이러한 고전을 통해, 붕괴와 역 붕괴 기술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남극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적에 대한 발굴 및 연구는 순식간에 전면 해금되었고, 이론물리학 연구에의 투자도 이전에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하지만 유적 기술의 근본을 단시간 내에 소화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루련의 연구기구는 최후의 수단으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유적을 활성화하여 역설계하는 것이었다. 1세기 전에 시도했던 가장 간단하고 거친 방법의 실용 유적기술이었다.


  유적의 활성화 작업은 즉시 전개되어, 연구팀은 단기간 내에 결론에 도달했다. 유적 시설을 전면 활성화하기 위해선 완벽한 유전자의 발현이 필요한데, 이 부분은 GAVIRUL 재현 계획인 "흑백합와 백장미"가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루련이 유적 연구의 희망을 버리려던 바로 그 때, 누군가가 GAVIRUL 태아의 배양이 13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삼여신계획'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였다.


6. 삼여신계획


  '삼여신'[각주:17]계획은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남극과 루련의 공동 연구로 진행된 유적 프로젝트이다. 밀월 관계였던 양측은 이 계획에 매우 우호적이었고, 계획은 빠르게 실행되었다. 2078년, 루련의 생물학자 윌리엄 교수와 남극의 이론물리학자 필립 박사가 공동으로 인류사상 또다른 GAVIRUL 재현 계획을 진두지휘했다. 윌리엄 교수는 샘플의 재현을, 필립 박사는 GAVIRUL의 유전자와 유적물질의 배열방식을 맡아 연구했다. 그러나 '라케시스' 샘플의 분실 (루련의 고의적 은폐라는 주장도 있음) 로 인해 재현 계획은 '아트로포스' 의 복원 작업에 집중되었다. 복원 작업에는 다양한 배양 기술이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인공 자궁 배양 외에도, 시험관 태아를 지원자의 자궁에 이식하여 자연분만하는 방식이 점차 많이 채용되었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태아의 생존률은 소폭 상승했다 (사망률이 72.3%로 감소). 마지막 단계에서 G-179, G-214, G-264 세 표본이 살아남았다. 이 세 관찰 대상은 모두 초대 실험체 '로즈'의 성장 패턴과 유전적 결함을 이어받았다. 관찰 단계로 접어든 후 윌리엄 교수는 세 명의 실험체에게 각각 '제퓨티 (G-179)', '노이에르 (G-214)', '루니시아 (G-264)' 라는 이름을 붙이고[각주:18] 3년간 양육 관찰 기간을 가졌다. 2084년 윌리엄 교수와 필립 박사의 연구 이념이 충돌하여 이후의 연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2085년, 루련과 남극 사이의 정세가 험악해졌고, 남극 측 연구진은 베를린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남극의 연구진 귀환 계획은 루련의 특수요원들에 저지되어 지지부진했다. 2086년, 연변 국가에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세계에 전운이 감돌았다. 캔버라에 체류 중이던 필립 박사와 그의 가족은 탈출에 실패하였고, 나중에 군중 소요에 휩쓸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87년에 이르러서는, GAVIRUL 재현 계획의 마지막 남은 성과인 세 명의 실험체 중, G-214 '노이에르'는 루련의 통제 하에 들어간 것이 확인되었고, G-264 '루니시아'는 남극이 확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G-179 '제퓨티'는 혼란한 와중에 종적을 감추었다. 첩보에 따르면, G-214 '노이에르'와 G-264 '루니시아'가 양국의 통제 하에 들어간 5년 동안 양국의 유적 과학기술에 비약적인 진전은 전혀 없었다. 노이에르와 루니시아는 유적물질 능력을 활성화시킬 힘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 때문에 두 명과 달리 자연분만 배양 방식을 채용하여 만들어진 G-179 '제퓨티' 실험체에게 루련과 남극 양측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상대방보다 먼저 그를 포획하는 것이 GAVIRUL 재현 계획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제퓨티의 행방은 세계 어디에서도 오리무중이었다. 2092년, '빵집 (Bakery)' 작전으로 다시 발견되기 전 까지는.


7. 빵집 작전


  기술병목과 점점 심해지는 루련의 공격에도, 남극은 제퓨티의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2092년 남극 정보기관 M.I.D.[각주:19]는 루련에게서 G-179 실험체 '제퓨티'와 다수의 신원미상 인원이 폴란드 영내에 체류중이라는 정보를 탈취했다. 루련이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M.I.D.는 비밀리에 8명의 특수요원에게 위장 신분을 부여하고 코카서스 산맥으로 파견하여, G-179 일행을 포획 후 남극으로 데려오는 작전을 실행한다. 이른바 빵집 작전이었다. 빵집 작전은 칼 마인드필 대위의 지휘하에 진행되었다. 카라차이 구 테베르다 시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산지에서, 8명의 요원은 모든 사전 조사와 감시를 끝마쳤다. G-179의 동향을 확인한 후, 캄퍼 대령이 이끄는 TASA 제3 분대가 포획과 철수를 위해 출격했다. 그러나 정보 유출과 계획의 착오로, 칼 대위의 요원들은 목표 지역에 진입한 직후 적의 매복을 맞닥뜨렸다. 이로 인해 총 7명의 요원이 희생되었다. M.I.D.는 이미 G-179와 또다른 신원미상의 실험체[각주:20]와 접촉하였으나, 내부자의 배신으로 침투소대 2개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요원 '멘도'가 홀로 G-179와 함께 적진을 뚫고 도주하여, 그를 루련의 추격대로부터 보호하는 데 성공하였다. TASA가 철수 지원을 위해 도착했지만, 때맞춰 루련군이 포위를 개시하였다.  루련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카드를 동원했다. 동부 전선의 주요 지점 여러 곳에서 수 개의 집단군이 돌연 반격을 개시하여 남극군의 작전 여력을 묶어두었으며, 고밀도의 저지선을 만들어 남극의 증원군 침투를 막기 위해 기계화 사단 3개를 투입하였다. 또한 북방 군관구의 거의 모든 전투기와 전자전기를 발진시켜 남극 공군의 근접 항공지원을 봉쇄하였으며, 다수의 특수부대를 여러 루트로 마을에 진공시켜 G-179의 보호를 맡은 TASA 소대를 고전시키고 남극의 장거리 화력지원을 어렵게 만들었다. 2시간의 교전 후, G-179가 돌연 단독행동을 시작하여, 요원의 통제를 벗어나 이탈하였다. TASA는 어쩔 수 없이 빵집 작전을 포기하고 교전지역에서 물러났다. G-179는 최종적으로 루련의 손에 들어갔다. G-179를 포획한 루련은 곧바로 그를 은닉하였고, 이후 남극의 정보기관들은 꼬박 2년째 그의 소재를 추적하였다. 


8. 불씨 작전과 제1 차 남극 전쟁의 종결


  불씨 작전은 제1 차 남극 전쟁에서 남극군이 벌인 마지막 대규모 작전이었다. M.I.D.는 루련이 G-179를 숨겨둔 비밀기지, 코드명 '곰굴'을 찾아내기 위해 스파이를 잠입시켰다. 캄퍼 대령은 M.I.D.가 상대를 너무 얕잡아본 것과 정보 수집에서 착오를 일으킨 것 때문에 빵집 작전이 실패했다고 믿었다. 그는 빵집 작전의 전훈을 수용하여 작전 개시 이전에 심혈을 기울여 준비작업을 하였고, M.I.D. 대신 특수전사령부의 지휘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루련이 설계한 비밀기지는 사실 유적 내부에 만들어진 커다란 연구소였다. 루련은 실험체를 유적설계의 활성화와 역설계에 사용했으며, 실험체의 개조 역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유적 연구소의 보호를 위해 루련은 대량의 자금을 들여 완벽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게 했다. 붕괴와 역붕괴 계획의 연구속도를 높이기 위해, 루련은 ARPA (고등 연구 계획국) 을 부활시켜 유적 연구의 군사화와 방어를 하나의 지휘체계 아래 통합시켰다.


  이런 대규모의 유적 군사화계획은 자연히 남극 정보기관의 귀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극은 여전히 기지의 위치를 제외하고는 루련의 유적 군사화계획에 대해 알아낸 것이 거의 없었다. 충분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경솔한 군사타격은 너무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M.I.D.를 믿지 않는데다 G-179의 탈환에 조급해져 있었던 캄퍼 대령은 곰굴을 공격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기술 우위를 잃을 수 없었던 남극은 그의 작전요청을 신속하게 승인하였다. 불씨 작전은 2094년 11월 7일 개시되었다.


  남극의 혼성부대는 먼저 기지의 측면 5km 범위에 화력 차단을 개시, 이와 함께 강력한 전자교란으로 곰굴의 통신과 방공체계를 마비시킴과 동시에 정규부대를 곰굴의 주요 도로로 전개하였다. 루련의 방어병력이 반격을 시도하여 남극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했으나, 항공지원을 얻어맞고 곧바로 궤멸되었다. TASA는 5대의 수송기에 나뉘어 타고 기지 위로 강하하던 중 2대를 적이 숨겨둔 대공포화에 잃었고, 그 2개 소대는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추락한 수송기에서 생존한 유일한 TASA대원이 기지의 비밀 출입구에서 발견되었다. 특기할 만한 부분은, 그 대원이 2년 전 G-179 제퓨티와 만난 바로 그 요원이라는 점이었다. TASA는 안팎의 협공으로 곰굴의 저항을 분쇄하였다. 대원들은 또한 G-179의 원본을 찾아내었다. 이어진 유적 깊은 곳의 수색에서, 멘도는 루련이 실험체를 대량으로 복제하고, 실험체의 유전자 데이터를 최신형 전술인형에 심으려 한 것을 발견했다. 또한 뜻하지 않게 멘도는 G-214 노이에르도 대량의 복제품과 함께 발견했다.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실험체의 원본을 확보하고 동시에 가능한 한 정보를 빼내면서 시설을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TASA의 외곽 소대가 멘도의 지원을 위해 합류하려 했으나, 내부에서 루련의 정예 방어병력에 저지당했다. 지원을 받기 어렵게 되자 멘도와 실험체들은 어쩔 수 없이 유적 안쪽으로 후퇴하였다. G-179와 G-214은 근접전에서 놀라운 활약으로 곰굴 방어부대를 크게 골탕먹였다. 루련군은 실험체가 파괴될 것을 염려하여 화기를 사용할 수 없었고, 그 틈을 이용한 멘도 등의 반격으로 극심한 사상자를 냈다. 그때 루련의 지원군이 도착하였다. 남극 특수부대는 대규모의 정규군에게는 대항하기 어려웠다. 공군의 체공시간에도 한계가 있었다. 남극은 멘도에게 신속하게 실험체를 데리고 곰굴을 탈출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루련 역시 실험체를 탈환하고 더욱 부대를 증원하여 적을 일거에 격멸하려 했다. 양측의 승부의 관건은 실험체를 뺏느냐 뺏기느냐에 달려 있었다. 곰굴 방어군 지휘관은 추격부대에 '강총병'AA-03을 배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유적 깊숙이 들어간 멘도 일행은 곧 AA-03에 제압되었다. 그러나 비극이 벌어졌다. AA-03의 중화기가 유적 2층의 방호격벽을 파괴하여 붕괴액의 이온화 방호층이 효력을 잃었고, 입자 구름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항 ELID 유전자 개량을 받지 않은 루련 병사들은 곧바로 저복사광역성감염증 증상을 보였다. 곰굴의 방어는 와해되었다. 입자 구름 유출로 인해 유적 내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고밀도 입자중합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붕괴액이 폭발하여 제1 차 북란도 사건과 맞먹는 전세계적 재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남극 고위층과 루련 고위층은 놀랄 만큼 순식간에, 루련이 연구기지를 한순간에 소멸시킬 수 있는 비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이해가 일치하였고, 남극의 AR.Cop. NB-90에서 XK-플루토3 장거리 탄도탄을 발사하기로 했다. 루련은 부대에 미사일 발사를 막지 말고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평소와 달리 XK-플루토3 미사일은 탄두를 장착하지 않고, 대신 엔진 내의 용해된 플루토늄을 유적 내부로 투입하여, 모든 붕괴액을 기화시켜서 붕괴입자 구름의 2차 대규모 분출을 막을 예정이었다. 붕괴액 유출 때문에 통신장애가 발생하여, 곰굴과 인근에서 작전 중이던 TASA는 철수 명령을 수신하지 못하였다. 멘도와 실험체들은 이성을 잃은 루련군 감염자들에 맞서 싸우면서 유적 탈출을 시도하였다. 캄퍼 대령이 아직 전력이 남아 있는 소대를 이끌고 합류하려 했으나, 곰굴의 지휘관도 잔존 병력을 이끌고 최후의 저지선을 구축하였다. 입자 구름의 농도가 높아져 전장이 보이지조차 않는 상황이었다. 캄퍼 대령, G-179 제퓨티, 멘도, G-214 노이에르, 그리고 남은 TASA 소대원들은 전투 중 실종되었다. 지표면부터 지하 70m에 이르기까지 기지 전체가 철저하게 용해되어, 이 인원들의 최후는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전투는 쌍방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루련은 가장 중요한 연구기지를 잃었고 해당 유적을 봉인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남극은 대량의 병력과 항공기를 잃었다. 특히 최정예부대인 TASA를 잃은 것은 남극군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심대한 타격이었다. 남극의 가공할 장거리 타격 능력과 단시간 내에 유적 연구를 회복시키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루련은 남극의 해안봉쇄를 깨뜨릴 희망을 잃었다. 루련 수뇌부가 무너지고[각주:21], 새로 들어선 정부가 스스로 평화회담을 제의했다. 정전 협상은 그로부터 두 달 후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루련은 남극연방과 연방에 가입한 국가의 합법적인 지위를 승인하였고, 남극은 루련의 봉쇄를 풀고 국지 타격을 멈추었다. 양측의 군사적 적대행위는 여기서 종결되었다. 전쟁의 종결은 세계 정세에 미묘한 균형을 가져왔다. 양측 모두 전쟁 중에 교훈을 얻었고 다시금 힘을 비축했다. 2112년 제2 차 남극 전쟁이 다시 발발할 때까지, 18년 동안 거짓된 평화가 이어졌다.


9. 우담바라 작전


  우담바라 작전은 M.I.D.의 비공식 침투작전이다. 루련과 남극은 평화협정에 서명했지만, 양국의 첩보작전은 결코 쉬는 일이 없었다. 우담바라 작전은 남극이 벌인 흑색작전 중 최초도, 최후의 것도 아니었다. M.I.D.는 루련이 북란도의 폐허가 된 유적에 진입을 시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북란도는 비무장지대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남극은 정탐을 위해 정식으로 부대를 파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M.I.D.는 신분을 위조한 요원을 보내 북란도를 조사하는 흑색작전을 벌였다. 북란도는 당시 붕괴액 분출의 중심이었지만, 대부분의 붕괴입자 구름이 대기중으로 흩어져 북란도 주변의 오염은 심각한 수준이 아니었다. 일부 입자 구름이 땅으로 내려와 침전되어 있어, 남극연합의 보건부에 해당 지역을 정화할 필요가 있는지 조사하고 심사할 임무가 내려왔다. 남극은 신분을 위조한 요원을 연합 보건부의 조사대에 들여보냈고, 이윽고 조사대는 북란도로 들어갔다. 북란도의 폭도들이 조사대 행렬을 공격하여 엄청난 사상자가 났으며, 뒤이어 북란도의 입자 오염도가 이유를 알 수 없이 급격하게 상승하였다. 루련군은 어쩔 수 없이 해당 구역을 폐쇄하였고, 감염증 증세를 보이는 생존자들을 사살하기 시작하였다. 남극 정보기관은 최후에 암호화된 통신을 수신하였다. 북란도에 GAVIRUL 태아가 존재한다는 메시지였다. 이후 요원과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끝내 북란도는 수차례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10. 제2 차 남극전쟁, 그리고─

  1. 특기할 점은, 이전 세기의 70년대부터 소련은 붕괴액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통제가능하고 핵을 쓰지 않는 대량살상병기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비슷한 실험이 동시기에 미국에서도 시행되었다. 미국은 소련과 달리, 그 화합물에 식별코드를 붙이고 밀폐형 토로이드 편광장치를 이용해서 육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본문으로]
  2. 이것이 가장 믿기지 않는 부분이다.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정설 중 하나가 불확정성 원리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입자의 운동 궤적을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미시물리학에서는 입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 하물며 물질 전체의 입자 배열을 정확히 기록하는 모형을 만든다는 것은 기존의 과학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본문으로]
  3. 가장 간단한 예로, 원본 저장용 메모리에 데이터를 기록한 후 붕괴를 진행하면 밀도가 증가할 것이다. 메모리 여러 개를 이런 식으로 만들고 그 중 사용하는 것에만 역붕괴를 일으켜 양자전송을 진행하면 엄청난 연산속도와 저장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질량이 보존된다는 전제 하에 슈퍼컴퓨터의 연산속도를 5조 배 가량 높일 수 있다. [본문으로]
  4. 상세한 내용은 <남극군 군사정보부 AA시리즈 보고>를 참조할 것. [본문으로]
  5. 또한 릴리와 로즈의 DNA 예비분에 '라케시스'와 '아트로포스'라는 코드명을 붙여 영하 80℃의 항온실에 보관했다. [본문으로]
  6. 부중자 프로젝트의 주 목적은, 인체 구조를 영구적으로 파괴하는 붕괴입자의 복사를 차폐할 수 있는 소형 강화외골격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모듈식으로 설계되어 산업용, 군용, 경찰용 등 다양한 장비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본문으로]
  7. 부중자 시리즈가 개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3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탓에, 1형과 2형의 외골격 구조는 이후의 AA-01과 AA-03 플랫폼에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 때문에 중량을 줄이기가 매우 어렵고 배선이 비효율적인 등등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새로운 세대인 AAX-05와 이후의 AA시리즈가 개발되었다. [본문으로]
  8. 이들의 명칭은 '특별평화유지경찰'이지만, 이것은 대중의 공포를 줄이기 위한 대외용 가명이었다. 이 부대의 실제 이름은 '특수대상대응무장경찰 (Special Circumstances Armed Police Force, SCARF)" 로, 주 임무는 유적에 대한 방호 활동과 ELID 관련 돌발사태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9. 루크사트주의는 미더 루크사트가 주창한 새로운 정치 이론체계이다. 루크사트주의의 핵심은 사회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며, 협의의 계급관리 이론과 함께 고도로 자동화된 시스템이 주도하는 사회를 역설한다. 루크사트주의가 강조하는 사회 평등은 중·하층민의 지지를 받았고, 또한 권력의 집중화와 관료체계의 자동화 및 기술의 발전을 중시하는 이념은 정치계급의 인정을 받았다. [본문으로]
  10. 2041년까지, 각종 첨단기술의 존재와 가족의 안전 때문에, 정치 동향에 민감한 부호들이 이주해 왔다. 이에 대응하여 행정사무원도 끊임없이 늘어났고, 이로 인해 공동 도시의 인구는 1,420만 명으로 팽창했다. 리 데밍 박사의 입체적 도시계획학은 신입 도시계획자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고전이 되었다. [본문으로]
  11. 2075년, 홀로 호주 남쪽 바다를 항해하던 6만 톤급 유조선이 해적에게 나포당했다. 구조 신호를 받은 남극군이 신속하게 파견되었고, 성공적으로 해적을 무장해제하고 유조선을 구해냈다. 이 사건은 남극과 루련이 외교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으로]
  12. 역붕괴 페스 특급질량재건 공식은 m0=(m^2/t0)/(g^2/m)이다. 물질재건질량과 붕괴mil입자파장은 정비례하며, 역붕괴전자원의 회절속도와는 반비례한다. 붕괴로(爐)는 소형화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한 번에 붕괴와 역붕괴 작업을 할 수 있는 질량은 24톤이 한계였다. [본문으로]
  13. 반동식 감쇠 장벽은 높이 300m의 입자 중화 시스템으로, 주로 붕괴입자 구름과 방사능지대를 중화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대상 지구를 둘러싸는 모양으로 최대 2000m 거리마다 장벽 하나를 세우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막대한 건설 비용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중요 구역에만 지어졌다. [본문으로]
  14. 남극은 루크사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전적인 사회주의를 채택하였다. [본문으로]
  15. '대 남극 제재 법안'의 주요 차별적 요소는 다음과 같았다. 남극인 자연인의 부동산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남극과 루련 양측의 이민을 제한하였고,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무역장벽을 설치하였고, 고정환율제도를 운영하였다. [본문으로]
  16. AR.Cop.(Antarctic Rockwell Corporation) NB-90 물질왕복선은 남련 공군 전략항공대 최강의 무기이다. 8개의 P&W NP-4073 핵반응로를 두 개씩 묶은 4개조의 터보제트 엔진 덕분에, 전시대비 배치시에는 중간층 공역을 계속 맴돌면서 명령대기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이 항공기의 주요 기능은 슈퍼컴퓨터와 '거룡'레이더로 전장의 모든 곳을 지휘하고 조기경보를 내리는 것이다. 또한 극초단파 에너지를 이용해서 언제든지 물질붕괴전송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본문으로]
  17. '삼여신 계획'은 당시 연구팀이 지은 이름은 아니고, 뒤에 이 프로젝트를 조사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본문으로]
  18. 윌리엄 교수가 붙인 이 이름들은 아마도 삼여신 별자리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그 별자리를 이루는 세 개의 별의 이름이 각각 Jefuty, Noylu, Lunixya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윌리엄 교수는 이 세 명의 GAVIRUL 태아가 세계의 운명을 바꿔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운명의 세 여신의 이름을 붙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본문으로]
  19. M.I.D., Antarctic Union Army Main Intelligence Directorate. 남극연방군 정보관리총국. 군에 부속된 기구이며, 남극 공군 제1 특수작전부의 동원권과 지휘권을 갖고 있다. [본문으로]
  20. 이 미상의 실험체가 G-214 노이에르라는 정보가 있다. 뿐만 아니라 루련의 전 삼여신계획 참여자가 작전 중 출현했다는 목격자 증언도 있다. 그러나 그 두 정보를 확실히 증명할만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본문으로]
  21. 남극의 장거리 탄도탄이 국경을 통과하도록 허용한 것은, 연맹 주석으로서의 삶이 끝장날 것을 각오하고 내린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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