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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NRR


■■■군사정보부


               송달


■■■유럽방면군정보부          복본번호:2


■■■아시아방면군정보부       복본번호:3


일련번호: TS-■■■■SAD00*


기밀등급: I급


열람권한: 준장 이상





□개요


본 보고서의 목적은 연합군(전 UN군)이 유적과 강총병 (Assault Atillery) 및 그 인공배체를 연구하고 사용해 온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다. 또한 본 보고서는 전투 중 발견하여 노획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Part 1. 1945~1981 유적 시대


실질적으로, 강총병의 인공배체에 대한 연구는 강총병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60년도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몇 개의 나라만이 이 프로젝트를 독점하였고, 서로간의 전쟁에 병기로 동원하였다. 연구의 중점 또한 유적의 발굴과 복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나기 전, 미국과 소련 양측은 각자 전리품을 약탈할 조직을 설립했다. 미국 측에서는 러시아계 미국인 파시 (Boris Pash) 중령이 이끄는 알소스 팀 (Team Alsos) 이 조직되었다. 소련 측에서는 소위 '무역연맹' 부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실질적으로는 소련 국방위원회 (GKO, 1946년 이후 소련 각료평의회로 개명) 직속의 특별전리품위원회[각주:1]라고 할 수 있었다. 양측의 목적은 극도로 명확했다. 핵무기 연구원, 우라늄 정광, 로켓 기술, 접시형 비행기, 제트엔진, 후퇴익기의 풍동실험 자료 등등, 제3 제국과 일본 제국의 전쟁 유산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미국 측 부대가 더 효율적이었고, 그들은 소련측 인원이 당도하기 전에 다수의 물자와 자료를 성공적으로 탈취하였다. 소련에게 남은 것은 찌꺼기 뿐이었다. 미국인들은 득의양양하여, '엘리트가 운집했을 소련 특별전리품위원회가 어떻게 이리도 굼뜰 수가 있나?' 하는 의문은 아무도 품지 않았다.


이후 냉전이 끝나고 기밀해제된 자료를 본 후에야 미국은 소련의 인적 기량을 깨달았다. 소련 측의 진정한 목표는 언제나, 소위 '유적'이라 불리는 그것이었다.


소련 측이 유적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05년, 퉁구스카 대폭발이 있기 3년 전이었다. 연구 본부는 모스크바의 국립 로모노소프 대학 (Romonosov Moscow State University)에 차려졌다. 본부는 크렘린의 직속 산하에 있었으며, 차르 본인이 직접 관리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퉁구스카 인근에는 근대 인류가 장악한 첫 번째 유적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소련 측의 유적 연구는 미국 혹은 이후의 NATO보다도 40년은 앞서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1908년 6월 30일 경 퉁구스카에서 일어난 대폭발은, 사실 냉전기간 근대 인류에 의한 유적 해석 중 일어난 역사상 첫 번째의 인위적 유적붕괴 사건이었다. 흡사 핵폭탄과도 비슷했던 이 폭발은, 유적 내부의 반응로가 통제 불능에 빠지면서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 측이 핵무기 관련 인재와 설비를 선점하느라 분주한 동안, 소련 특별전리품위원회도 자신들의 목표를 찾아내었다. 제삼제국에 파견한 특수 조직이 발굴해낸 제1 유적 (Urkunde01)[각주:2]과, 이른바 '코셰이 (Koschei) 계획'의 전신이었다. 


소련 측의 또다른 특기사항으로는, 온전한 유적을 얻어낸 것 말고도, 나치의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 박사의 협력[각주:3]을 얻어냈다는 점이 있다. 이를 통해 소련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 진행된 인체실험 관련 기초 자료를 얻었고, 여기에 더해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의료 데이터베이스를 획득하였다. 소련은 심지어 굴라그의 노동 수용소 안에 관련 실험시설을 '복제'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사실 소련 측 시설이 독일의 것보다 좋았다) 이 자료 획득의 효과는 추후 드러나게 된다. 


특수조직이 발굴해 온 유적자료는 블라이셰로데 (Bleicherode) 에 보관되었다. 미국도 이곳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을 사로잡았다. 미국은 로켓과 관련된 설비와 기술자들의 대부분을 데려갔으나, 신은 소련의 편이었다. 붉은 군대의 선봉이 지척까지 도달하여, 사람이 부족한 알소스 팀은 유적 관련 자료들을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었고 (사실 미국에겐 유적 쪽을 우선 순위로 두려는 생각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유적 자료 대부분을 온전하게 회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소련 측은 노르트하우젠의 하르츠 산 지하에 위치한 온전한 유적과, 제3 제국이 십여 년 간 전력으로 연구한 기술 자료 전부를 손에 넣었다. 이 또한 우리가 보는 방대한 초기 자료들이 모두 러시아어로 되어 있는 이유이다. 소련은 유적 연구 분야에서 시작점부터 거의 반 세기 정도의 우위를 점하였다.


1947년 냉전이 시작되고 미·소 양측은 군비경쟁의 수렁에 빠졌다. 미국이 가졌던 핵무기 분야에서의 우위는 1949년 깨졌다. 소련 측도 미국에 상응하는 위협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양측의 경쟁은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 해 (즉 1950년), 우리가 노획한 자료에 의하면, 소련은 타바샤르B 시험장에 이른바 '불가사리'라는 것을 시험적으로 설치했다. 당시 미국 측에서는 타바샤르B 시험장을 제1 순위 타격 목표로 삼았고, ICBM이 전시 태세를 갖춘 뒤 줄곧 2종류 이상의 전략 핵무기가 이 시험장을 조준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획득한 정보에 의하면, '불가사리'는 결코 단일 무기체계나 장치가 아니었다. 소련이 1950년 타바샤르B[각주:4]에 배치한 것은 사실 블라이셰로데에서 획득한 유적 본체와 자료를 복제해 내는 모의 생산 시스템이었다. 부지만 146.63㎢에 이르며, 본체를 축으로 하여 120도 간격으로 다섯 개의 가지가 뻗어 있는 모양새였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일련의 공격적 복합무기체계가 아니었다. 소련측의 자료에 의하면, 이 체계는 1950년 가동에 들어가, 사용가능한 첫 번째 '제품'이 나왔을 때엔 벌써 1961년이었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Ammutseba-****-05-13>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영상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두루뭉술하고 흐릿한 영상이다. 다섯 방향으로 뻗은 거대한 인공 건축물이 보인다. 건축물은 방어시설로 둘러싸여 있고, 도로로 비행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비행장에는 최소한 연대급은 되는 항공기가 배치되어 있고, 건축물 주위도 온통 방공진지로 에워싸여 있다. 진지의 SA-2 대공미사일이 이미 발사태세에 돌입해 있다. 빽빽하게 배치된 미사일들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해설


이것은 우리가 최초로 획득한 '불가사리'의 영상자료이다. 이로부터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 이 고고도 정찰기는 격추되었다. 


소련 측의 유적 연구가 급격한 발전을 이룩함과 동시에, 미국은 자신이 유적 연구에 얼마나 뒤쳐졌는가 뼈저리게 깨달았다.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출범 직전. 바르샤바조약기구 창설이 불러온 혼란은 미국과 유럽의 각국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미국과 유럽은 마셜 플랜으로 축적해온 인력과 자원을 이용하여, 머지 않아 철의 장막을 형성하게 될 동구권 국가들에 깊이 침투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측은 처음으로 유적의 존재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다.


미국이 유적의 실제 증거를 발견한 것도 같은 해였다. 1955년에 남극에 맥머도 관측기지가 건립되었다. 기지 지하 1.1km 깊이에 위치한 보스토크 호 옆에서, 미국은 이후 '문'(D1)[각주:5]이라 불리게 되는 유적과 조우하였다. 이곳을 파내려가던 중 발굴된 기계의 잔해들은 본토로 보내어졌다. 이 잔해를 기반으로 록히드 마틴 사는 그 유명한 스컹크 웍스를 설립하였다. 이후 나온 U-2, SR-71, F-117, F-22, F/A-00 등은 기본적으로 그 잔해의 연구와 역설계를 통해 제작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1957년 미국에서는 유적의 전략적 영향력을 진지하게 고려하여, 유적 연구를 전담하는 비밀 정부조직 '시프터'[각주:6]를 설립하였다.


 미국 정부가 끔찍한 열세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국면을 전환하려 애쓰는 동안, 소련 측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1958년 소련은 자국의 정보망을 통해 미국이 D1유적을 발견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흐루시초프의 직접 지시에 따라 재편성된 국가보안위원회 (KGB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는 유적의 연구와 발굴작업 전반을 장악하고, 전문조직 제16 국에 관련 작업을 담당시켰다. 이로부터 소련의 발굴작업과 연구는 빠른 진척을 보이게 된다.


우리가 모스크바 국립기록보관소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1950년에서 1980년 사이 소련은 국내에서 총 5곳의 유적을 찾아냈다. 시베리아 얀스크11의 Okb-456, 우크라이나의 Okb-37, 북극권 빙반 아래의 Okb-10, 볼가 강 인근 카푸스틴 야르의 Okb-88, 그리고 이투루프 섬의 Okb-115[각주:7]이었다. 이 중에서 Okb-456과 Okb-10는 가장 거대한 규모의 유적으로, 밝혀진 면적만 백만㎢가 넘었다.


같은 시기에, 굴라그의 감옥에서는 멩겔레 박사와 그가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의학 실험 시설이 가동을 시작했다. 이 시설은 1981년 소련이 드레스덴 조약에 서명하기 전까지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진행했다. UN군이 포클랜드 제도의 의학 실험 시설을 정식으로 가동시키기 전까지, 굴라그의 이 시설은 유적 과학 기술의 연구목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훗날 강총병 계열에 쓰일 인공배체 기술의 수많은 초기 성과가 이곳에서 나왔다.


미국 역시 1955년 D1의 발견 이래 전세계의 유적 탐사에 박차를 가했다. 1950년부터 1980년 사이 미국은 국내에서 총 4곳의 유적을 발견했다. 남극의 맥머도 관측기지 아래의 D1, 뉴멕시코 주 로스 앨러모스 국립연구소의 D2, 캘리포니아 주 차이나레이크 기지의 D51, 그리고 와이오밍 주 워런 공군기지의 D9였다. 이상 4곳의 유적은 시프터의 직접 관리하에 있었다. 유적의 발굴과 연구를 위해 미국은 처음엔 군과 합작하는 방침을 취했다. 시프터는 1955년 D-1 발견 후 곧바로 공군과 손을 잡고 록히드 마틴 사를 기반으로 하여 스컹크 웍스를 설립했다. D-2가 발견된 1956년 이후, 시프터는 이번엔 육군과 합작하여 레드스톤 조병창 내에 은밀히 연구시설을 설치했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이후, 미국은 국방과 과학기술 정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소련의 중앙통제 체제가 보여준 무서운 집중력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군사연구 전략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미국은 군사과학 연구를 대학과 민간기업의 손에 돌려주었다. 이러한 노선을 따라, 시프터 역시 과학연구와 군사를 망라하는 기구에서 점차 순수한 정부기관으로 바뀌어갔다[각주:8]. 주관분야도 유적의 발견, 보호, 잠재적 적성국 유적의 탐사 및 파괴 등으로 축소되었다. 이로써 시프터는 번잡한 연구 작업에서 해방되어 하나의 공격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유적의 연구는 신생 조직인 ARPA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고등연구계획국) 에게 맡겨졌다. ARPA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재임 당시 직접 의회에 안건을 제출하여 설립된 정부기구였다. 이 건은 제출한 당일 의회를 통과하였고, 5일 만에 520만 달러의 제1 차 예산이 배정되었다. 1958년 ARPA가 정식으로 출범할 때까지, 미국 정부의 총 투자액은 2억 달러에 이르렀다. ARPA는 국방부 장관 직속으로 조직되었고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각주:9]. 여기서 소련의 진보한 유적 연구에 미국이 얼마나 거대한 위협을 느꼈는지를 볼 수 있다. 유적과 관련분야에 대한 이 막대한 지출 덕분에, 미국은 1981년 드레스덴 조약 체결 당시 소련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ARPA는 평범한 연구시설이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그들에게, 미국이 항상 최고의 기술 선도국이 되게 할 것, 최신 기술은 군사 영역에 적용할 것, 잠재적 경쟁국에게 불의의 추월을 허용하지 않을 것을 주문하였다. ARPA가 진행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준수해야 했다. 과업이 제 시간 내에 완료되지 않으면, 즉시 다른 팀으로 대체되어 프로젝트를 재개했다. 시간 지연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나 유적 연구에 뒤쳐져 있던 미국으로서는 단 하나의 실패라도 용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의 유적 경쟁이 정식으로 막을 올렸다.


때는 1961년. 소련은 타바샤르B에 10년이라는 시간과 헤아릴 수 없는 자금을 쏟아부은 끝에, 드디어 그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타바샤르B가 마침내 첫 번째 '제품'을 생산해낸 것이다. 소련 측은 이 제품에 'Слуга (하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61년 6월 비엔나 정상회담을 전후로 8월 베를린 장벽 건설, 9월 불법 핵실험 재개 등의 사건들 후, 미국의 승승장구에 위협을 느낀 흐루시초프는 참지 못하고 1961년 11월, '10월혁명' 기념 열병식에서 아직 '불확정 상태'에 놓여 있던 '종복'을 공개하였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적의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정식으로 공개된 사건이었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Aphoom-Zhah-****-12-13>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영상


끝이 보이지 않는 보병과 기갑차량이 광장을 지나간다. 디젤엔진의 매연으로 하늘이 온통 연회색이다. 커다란 트럭 8대가 나란히 전진한다. 병사들이 등을 꼿꼿이 펴고 짐칸에 앉아 있다. 뒤이어서 T-62 부대가 줄지어 지나간다. 포탑에 선 전차장이 군중에게 경례를 올리고 있다. 탱크 편대의 뒤편에는 4대의 무한궤도 견인차가, 널찍한 판에 바퀴를 단 수레를 끌고 있다. 바퀴의 지름은 얼추 보기에도 1미터가 넘는다. 수레 위에는 팽팽하게 묶인 올리브색 방수포가 덮여 있다. 방수포 아래의 물체는 마치 아무렇게나 빚은 빵 덩어리 같은 모습으로, 그 크기가 거의 집 한 채 정도는 되어 보인다. 수레 주위를 같은 차대의 무한궤도 차량이 호위하고 있으며, 그 위에는 실탄을 장전한 병사들이 올라타 있다.


방수포 위에는 커다란 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원 중앙에는 은색의 오망성이 있다. 부대 표지 같아 보이지만, 붉은군대 어디에도 이런 표지를 쓰는 부대는 없다. 셈어와 상형문자를 섞어놓은 듯한 문자가 원을 둘러싸듯 써져 있지만, 판독해 낼 수가 없다.


□해설


1961년 붉은광장, 10월 혁명 열병식. 이날 소련은 대중 앞에 최초로 'BOOJUM[각주:10]' 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무기를 공개하였다. 이들은 이른바 '불확정 상태'에 놓인 BOOJUM 부대였다. 수레의 도색은 제7 근위공병여단의 표지이다. 이 부대는 편제상으로는 키예프에 주둔하면서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핵 시설 건축을 담당한 군 건설부대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부대가 KGB 제16 국의 특별부대로서 '불가사리'에서의 건설과 생산을 전담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정보가 입증하고 있다. 다른 부대도 이 부대와 장비 상황이 비슷하다고 가정하고, 알려져 있는 소련군의 편제로 추산하면, 1961년에 불가사리가 생산한 '제품'의 수는 대략 280체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영상


5대의 Tu-95 '베어' 폭격기가 모스크바 상공을 날고 있다.


□해설


그러나 우리가 보아 왔듯, 냉전 기간 동안 군사 분야에서 소련의 기만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상술한 방법으로 'BOOJUM'의 수량을 계산할 때에는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2077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1964년 레닌 묘 앞에서의 열병식에서 관측된 Tu-95는 총 240대였다. 그러나 정보에 의하면, 당시 소련 공군의 설비가 지탱할 수 있는 수요는 160대 뿐이었다. 투폴레프 설계국과 쿠이비셰프의 시설 사진으로 진행된 분석에서도, 당시의 생산량으로는 겨우 60~120대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1964년의 열병식 사진을 통해 이어진 분석으로, 단 20대의 Tu-95가 5기씩 4개 편대로 같은 공역을 되풀이해서 날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폭격기의 항로는 모스크바에서 관측할 수 없는 먼 곳에서 정밀하게 관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1964년 소련군의 예상 전투력은 크게 부풀려졌다. 소련군의 선제공격 능력은 약 300% 과대평가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련의 선전에 대해 이성적 시선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저 4체의 '하인'이 그들이 당시 가졌던 모든 것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설령 우리의 분석대로 소련의 과대선전이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미국을 공황 상태에 빠뜨리기엔 충분했다. 시프터에게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인의 실체와 능력을 알아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프터 역시 유능한 집단이었지만, 1961년 열병식에 참가했던 하인과 그 부대는 마치 이 세상에서 증발한 듯 사라져 버렸다. 소련 국방부 고위층에 심어둔 CIA의 스파이들조차 하인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고, 연관된 모든 서류가 완전히 소각되었다. 이것은 시프터가 자신감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소련이 1961년 10월혁명 열병식에 내보냈던 'BOOJUM'이 아직 불완전한 상태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직 무기로서의 전투력, 혹은 위협수단으로서의 위력을 갖추지 못했다. 또한 소련은 이 '제품'의 생산을 지속할 능력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이러한 기술에 대한 이해도는 결코 우리를 넘어서지 못한다[각주:11].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역사에 기록된 대로,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하려 함으로써 촉발된 미·소의 팽팽한 대치로 인해, 세계는 핵전쟁의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8개 항모전대를 소집하고 68개 비행중대로 캐리비안 해를 완전봉쇄할 만큼 미국을 당황하게 한 것은, 소련의 미사일 같은 것이 아니라 1961년 이래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BOOJUM' 부대였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Arwassa-****-10-03>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영상


소련 기를 단 화물선이 바다 위를 항행 중이다. 갑판은 컨테이너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실탄으로 무장한 소련의 병사들이 배 위를 순찰하고, 임시로 배에 가설된 소구경 대공포가 카메라를 따라가며 조준하고 있다. 카메라의 초점이 흐릿해지더니, 더욱 가깝게 줌 인한다. 갑판 중앙에 위치한 컨테이너 하나가 방수포로 팽팽하게 감싸여 있다. 방수포 위에는 은빛 원 한가운데 은빛 오망성으로 이루어진 표지가 그려져 있다.


□해설


이것은 어제 캐리비안 해 상공의 정찰기가 찍은 소련의 화물선 '루살라' 호이다. 배 위는 소련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촬영 과정에서 정찰기가 몇 번이나 대공 레이더에 노출되고 락온되었다. 이것은 이 배가 최소한 대공미사일 혹은 레이더 유도식 대공포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몇몇 열려 있는 컨테이너 안에서는 분해된 Mig-21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소련의 최신형 전투기로, 아직 국토방공군에조차 완전히 보급되지 않은 것이었다. 배 중앙의 방수포로 감싸인 컨테이너 크기의 물체에는, 1961년 열병식에 등장한 BOOJUM과 같은 표지가 찍혀 있었다. 같은 모습의 물체가 도합 8개였다.


우리가 확보한 문건에 따르면, 위 자료는 CIA에 의해 1962년 10월 20일 오전 케네디 당시 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기밀해제된 녹음자료에 의하면, 그 때까지만 해도 미 정부에서는 마땅히 캐리비안 해를 봉쇄하는 강경조치를 취해야 할지, 터키와 서독에서 레드스톤 탄도미사일[각주:12]을 철수시켜 평화 협상을 이끌어내야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위 자료를 통해 소련이 미국에서 단 217km 떨어진 쿠바에 정체불명의 'BOOJUM'을 배치하려 함이 확실해지자, 논쟁은 순식간에 끝났다. 미국은 2차 대전 이래 최대 규모의 함대를 집결시켰다. 소련이 핵미사일 탑재 잠수함을 배치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미군은 어떠한 대가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소련을 압박하였다. 결국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정황상 소련이 '종복'을 마침내 장악한 것으로 보였음에도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꼬리를 내리는 것을 보고, 시프터는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소련은 여전히 타바샤르B와 종복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각주:13].


"인간이 느끼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은 공포이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공포는 미지에 대한 공포이다." 이 문장은 냉전과 이후 이어진 정치적 분쟁에서 언제나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정신분석정치학적 견지에서, 2081년의 평화회담 결렬 역시 비슷한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공포가 양측을 점차 지배하기 시작하고, 사회가 그에 호응하는 지경에 이르면, 이미 양측은 자신들이 스스로 극한 상황으로 내달리고 있다는 것마저 깨닫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1965년, 미국의 유적 연구에 새로운 진전이 있었다. 1965년 3월, 시프터와 ARPA는 공동으로 '자유의 여신상'이라 이름붙은 비밀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의 목적은 서로 다른 유적들 사이에 물리적인 연관이 존재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연구 기간 동안 ARPA는, D1 빅토르-탱고에 위치한 통칭 '문'에서 1.5kg의 금덩어리를 D51이 있는 차이나레이크 기지로 전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유적의 리버스 포지셔닝 기술이 최초로 구현된 것이었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AtIach-Nacha-****-07-06>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영상


영상이 온통 흔들리고, 라디오 잡음에, 화면은 마구잡이로 혼란스럽다. '문'이라 불리는 물체 안에서,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어떠한 빛줄기들이 방출되고 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빛의 색깔은 시퍼런 보라색인데, 주변의 측정기기에 계측되는 스펙트럼은 붉은 색이다. 가이거 계수기의 바늘이 미친 듯이 돌아간다. 숫자는 끊임없이 고점과 저점을 왕복하고 있다. 누가 봐도 망가진 것이 확실하다. 시퍼런 보라색 광선 속에서 점점 금덩어리의 형상이 나타나더니, 이윽고 빛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해설


이 영상은 D51이 있는 차이나레이크 기지 지하에서 촬영되었다. 남극의 D1 빅토르-탱고에서 온 금덩어리가 순조롭게, 그러나 형언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점점 구현화하고 있었다. 주위의 측정기기들이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었다. D51 지하에 설치된 것은, D1 빅토르-탱고의 '문'이라 불리는 장치를, D1에서 발견한 유사 부품들을 사용하여 조립해낸 것이었다. 각 부품들이 스스로 움직여서 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장치의 원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문' 들 사이에 어떠한 물리적 연결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증명하였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아직 그 원리를 밝혀낼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유적은 단순히 하나의 계통으로 묶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미·소 양국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미국이 장악한 D1 빅토르-탱고와 소련이 노르트하우젠 하르츠 산 지하의 Urkunde01를 복제하여 만든 타바샤르B는 명백히 다른 계통의 유적이었다. D1은 유적 건축물 중 중계 시설, 혹은 '전송 시설'의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였다. 이는 D1에 왜 '문'처럼 작동하는 장치가 있는지 설명해 준다. 한편 소련이 장악한 Urkunde01과 이후의 타바샤르B는 생산 시설에 가까웠고, 이러한 토대 위에서 소련은 성공적으로 '종복'을 복제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유적 분류 이론은 소련의 M.J.실츠비아가 1966년 제출한 <유적 및 유사 건축물의 기능에 따른 분류 가능성> 이라는 논문을 통해 정식으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 그는 OKb-456의 주임 설계사로 일하고 있었다[각주:14].


 「우리가 마주친 건물은, 공룡이 살던 시대보다도 열 배는 더 먼 과거에, 아마도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과학 수준을 가진 문명이 만든 것이다. 건축가는 오래 전에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작품은 영겁의 시간을 버텨내고 지금 우리의 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한 우리의 건물은 200년 내로 사라질 것이고, 지형의 변화는 우리가 살았던 모든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이다. 고대의 현자들에 비한다면 우리는......」


<유적 및 유사 건축물의 기능에 따른 분류 가능성> 머리말, M.J.실츠비아


그러나 절대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기회 앞에서 그런 우려는 아무런 억제력이 없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닥치거나 희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해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받아들여졌다.


1968년은 미국에게 행운의 해가 아니었다. 미국은 4년째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968년 1월, 보응우옌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인민군이 미군을 상대로 '구정 공세'로 잘 알려진 대공격을 개시했다. 총 8만 명의 무장 부대가 미군 구역 내 거의 대부분의 도시와 전략요충지로 진격하였다. 대부분의 공격은 수 시간 내로 격퇴되었지만, 사이공을 겨냥한 공격은 3일간 지속되었고,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를 향한 공격은 몇 달 동안 펼쳐졌다. 구정 공세의 소식이 미국 본토로 전해지자, 그동안 베트남전이 수습되어 가고 있으며 베트남 인민군의 작전 능력이 약해져 가고 있다고 장담했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대해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인민군의 전력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았다. 전쟁의 끝은 멀기만 했다. 구정 공세의 마지막 단계에서, ARPA는 대통령의 비밀 지령을 받고 고압 기체 탱크가 담긴 세 개의 컨테이너를 통킹 만의 항공모함으로 운반했다. 컨테이너에는 ARPA가 D9 베타-주마 유적에서 추출한 노란색의 기체가 들어 있었다. 실험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이 노란색 기체는 액화한 후 접촉한 유기물을 침식해 들어갔다. 인간의 피부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Baoht-Z'uqqa-Mogg-****-05-12>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영상


유리로 된 실험실 내부, 한 피실험자가 수술대 위에 묶여 있다. 노란 가스가 서서히 실험실 내부로 주입된다. 피실험자에게는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다. 노란 가스가 차츰 액화하여, 실험실 유리벽 내벽에 구슬지어 맺힌다. 피실험자가 비명을 지른다. 그의 피부가 액체에 침식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떠한 산(酸)의 용해작용과도 달랐다. 액체에 닿은 피부가 벗겨지고 뼈가 드러나는 광경은, 흡사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먹히고 있는 것 같았다.


□해설


이것은 D-9 베타-주마에서 이루어진 제1 차 실험이다. 우리가 유적 지하에서 최초로 마주친 것이 바로 이 고분자 기체였다. 이것을 추출하여 연구한 결과, 이 기체를 물리적으로 액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나, 유기물과 접촉할 경우 저절로 액화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액화한 가스는 유기물을 침식해 들어갔으며, 침식이 끝나면 스스로 기체 상태로 돌아갔다. 이 실험에서 실험실 내부의 유일한 유기물인 피실험자에게 황색 액체가 접촉한 후, 피실험자의 피부 조직이 완전히 용해되기까지 약 300초가 소요되었다.


마지막 추출 작업 중 미국 측은 이 가스를 130톤 가량 입수하여, 각지의 실험실에 연구용으로 분배된 소량을 제외한 대부분을 D9 베타-주마 지하 약 300m에 위치한 격납고에 비축하였다. 1968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3개의 컨테이너에 실린 총 3톤의 기체가 보조설비와 함께 비밀리에 통킹 만의 항공모함에 적재되었고, 베트남의 전장에서 실전 실험에 투입되었다. 실험 기간 내내 ARPA는 기밀 유지를 위해 그 가스를 '연소 촉진제'라 불렀으며, 문서자료에는 절대 정부의 표식을 남기지 않았다. 폭격임무를 맡은 비행중대는 특수하게 개조된 F-4에 탑승했다. 이들은 '썬더 캣' 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는, 시프터의 직속 부대였다. 미군이 베트남전 중에 실제로 시행한 실험의 횟수는 불명이다. 그러나 1975년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을 때, 그 3개의 컨테이너는 어떠한 회수물자 목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3톤의 가스가 모두 사용되었으리라 여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Basatan-19××-××-×× (034)>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고공 촬영 사진


울창한 열대우림이 사진을 가득 메운다. 자세히 살펴보면, 숲 속에 조그맣게 병사들과 차량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에서는 밀림 한가운데 돌연 나타난 직경 약 500미터의 둥그런 빈 땅이 보인다. 지표면이 시커멓다. 첫 번째 사진에서 보였던 차량의 잔해는 확인할 수 있지만, 숲과 병사들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해설


이것은 베트남에서 이루어진 실험 중 하나이다. 촬영 간격은 약 1시간, 지정된 실험구역에 B-52 폭격기의 폭격이 이루어진 후, F-4 비행중대가 가스 탱크 1개를 투하하였다. 폭격의 참상은 호치민 루트 부근의 숲 전체에 넓게 퍼졌다. 정찰분석 결과 평소 이곳은 베트남 인민군이 폭격을 피해 은신하는 집결지였다. 실험 이후 이곳이 어떻게 변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범위 내의 토양 전체에 고열로 인해 타버린 듯한 흔적을 남기고, 그곳에 있던 유기물은 전부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숯덩이가 된 차량 이외에 인간이라고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적의 산물이 전쟁에 사용된 사례였다. 1981년 드레스덴 회담에서, 미국 정부와 ARPA는 미국이 유적 기술을 무기로 배치하거나 사용하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소련 측에서 '종복'과 관련된 실험자료를 공개하고 교환을 제의하자, ARPA도 이를 수락하고 정보를 공개하였다.


1971년, 소련의 타바샤르B에 위치한 생산시설에서 낭보가 들려왔다. 실츠비아 교수의 주도 하에 소련 연구진이 종복의 안정화에 성공한 것이다. 비로소 종복의 정체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생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기계에 가깝다. 우리가 타바샤르B에 건설한 모의 생산 시스템에서 이와 유사한 '배양조'를 '복제'해낼 수 있다...... 로모노소프 대학의 로만스키 교수가 제창한 이론이 맞았다. 우리는 종복을 통제할 수 있다......"[각주:15]


그러나 그럼에도 타바샤르B 생산시설의 출하량은 연간 4~6체에 불과했다. 불명확한 생산공정과 기술체계 때문에, 소련 측은 복제 공정을 개선하여 생산량을 늘릴 수가 없었다.


물론 신은 언제나 소련에게 웃어주지만은 않았다.


1970년에서 80년까지의 10년간 소련의 유적 연구는 좀처럼 진척을 보지 못했다. 여러 곳의 연구소에서 제각각 연구를 진행하는 방식이 비효율을 낳았던 것이다. 각 유적들 사이에 펼쳐진 광대한 대지가 연구진의 교류와 소통을 가로막고 있었다. 실츠비아 교수는 유적 연구를 주관하는 KGB 제16 국에 수 차례 찾아가, 미국의 연구체계를 모방하여 국립 로모노소프 대학이 유적 연구를 다시 총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16 국은 연구가 아니라 행정과 정보공작이 주 업무인 부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소련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체제였기 때문에, 실츠비아 교수의 요청은 묵살되었다. 이후 1973년 5월, OKb-10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소련의 유적 연구 체제는 변화를 겪게 된다.


1973년 5월 12일, 북극권의 빙반 아래 위치한 유적 OKb-10에서 로모노소프 대학과 제16 국으로 향하는 통신이 두절되었다. 원인은 불명이었다. 이후 수색과 구조를 위해 투입된 북방함대 해병대는, OKb-10에 진입하여 신원미상의 적과 맞닥뜨렸다. 상황은 곧바로 정리되었으나, 이후 구조대 인원에게 생물재해에 의한 침식 현상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우리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소련에서 마지막으로 투입한 구조대는 전원이 제3 등급 생화학 보호장구를 착용하였다. 이는 그들이 어떠한 화학적·생물학적 오염지역에서도 한 시간 이상 생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은 유적 투입 후 20분을 넘기지 못하고 전원 사망하였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Baoht-Z'uqqa-Mogg-****-05-12>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영상


영상이 흔들린다. 기지 내의 경보등이 끊임없이 번쩍거린다. 화면 속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온통 혼란스럽다. 복도에서 보호의를 입은 소련군 병사들이 총을 쏘고 있으나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병사들이 차례차례 후퇴한다. 뒤이어 화면에 잡힌 것은 상식을 벗어난 몰골을 한 괴물이다. 대충 인간형으로 보이지만, 팔의 형태가 인류의 것과 명백하게 다르다. 하반신 역시 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야수의 일종을 섞어놓은 듯한 모양이다. 괴물들은 소련군의 탄막에도 아랑곳없이 방어선으로 달려들어, 맨손으로 병사들을 토막내 버린다.


□해설


이것은 1973년 5월 12일 13시 45분, OKb-10 내부의 감시카메라에 찍힌 영상이다. 보호의를 입은 소련 병사들은 북방함대 해병대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미지의 생물이 어디서 왔는지는 여전히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생물들이 몸에 두르고 있었던 의복 찌꺼기로 보건데, 생물재해에 의한 침식을 당한 인간이 변형한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영상


제3 급 보호의를 입은 소련군 병사가 유적 안에 위치한 집의 문을 연다. 집 안은 옅은 노란색 연기로 가득 차 있다. 병사들이 집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서로를 공격한다. 그들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해설


이것은 1973년 5월 14일 20시 37분 OKb-10 내부의 감시카메라에 찍힌 영상이다. 이 때 소련 병사들은 표준 제3 급 보호의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성능 보호의를 입고서도 그들의 생존 시간은 예상을 한참 밑돌았다. 영상에 표시된 시간으로 계산해 보면, 병사들이 건물에 진입하고 처음으로 착란 증상을 보이기까지 총 300초도 걸리지 않았다. 착란 증상이 시작되고 나자 변형의 속도는 크게 빨라졌다. 변형이 완료된 변형체는 물리적인 힘이 크게 향상되었으나, 이와 동시에 지능은 상당한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화면상으로 판단했을 때, 조작이 필요한 무기를 다루는 능력은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보였다.


소련은 사태가 수습될 가망이 없자, 감염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실츠비아 교수를 필두로 한 비상 과학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유적 바로 위 빙반에서 TNT 55만 톤 위력의 핵폭탄을 기폭시켰다. 얼음층과 그 밑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파괴되었고, 유적은 바닷물에 완전히 잠겨 버렸다.


당시의 상황 분석에 따르면, OKb-10 내부에서 1차 급성 '저복사광역성감염증 (ELID)[각주:16]'이 발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의 이론에 의하면 A형 ED[각주:17]는 일단 비교적 긴 잠복기를 거친 후, 감염기로 진입하고 일반적으로 24~48시간 내에 변형을 마친다. 그러나 모든 ED류 감염증의 감염조건과 마찬가지로, A형 ED의 감염자는 오로지 장시간 유적과 접촉한 대상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ED류 질병의 상세한 감염경로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A형 ED가 마치 방사능증처럼 복사 원점 (유적) 과의 장시간 접촉으로 인해 감염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북방함대 병사들이 유적과 접촉한 시간은 명백히 길지 않았다. 이러한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매우 제한적이다. OKb-10에서 진행된 연구는 ED의 병기화였다. 다시 말하면, 유적에 장시간 접촉한 것과 같은 작용을 하는 물질을 만들어, 이를 인체에 흡수시켜 감염을 유발하는 연구였다. 이러한 가정을 도입하면 사건의 전말은 명확해진다. 사건이 있던 날 OKb-10의 통신이 끊어진 것은, 실험 중에 누출이 발생했거나 실험이 실패한 것이 그 이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OKb-10사건 이후 관련 자료가 모두 파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정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가정에 신빙성을 더해 주는 또다른 자료가 있다.


이 사건의 대처 과정에서 주무부서인 KGB 제16 국은 체면을 크게 구겼다. 유적 연구의 특수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북방함대 해병대를 구호작업에 투입하여 대량의 인원 손실을 냈고, 그럼에도 유적 내부의 상황을 호전시키는 데 실패했다. 관료제의 부작용은 심각했다. 실츠비아 교수와 유적 연구팀은 사건 발생 27시간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16 국은 완벽하게 무력했고, 결국 사태만 더 악화시킨 끝에 유적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실츠비아 교수와 국립 로모노소프 대학을 중심으로 소련판 ARPA가 점차 형체를 갖추어 갔다. KGB 제16 국은 점점 유적 연구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미국과 소련의 유적 연구 경쟁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소련은 점차 다시 미국을 제치고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1975년, OKb-10 사건 2년 후, 소련은 우크라이나 OKb-37 인근에 NATO가 '오벨리스크'라고 명명한 무기 시스템을  배치하였다. 소련은 이를 '코셰이 (Koschei)' 라 불렀다.


이것은 인류가 실전에 배치한 최초의 유적 병기 시스템이었다.


■영상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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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화면


거대한 시멘트 오벨리스크가 관처럼 생긴 세 개의 호수에 둘러싸여 있다. 중심부를 따라 120도 간격으로 뻗은 운하들은 각각 발트 해와 소련 중심부로 향하고 있다. 시설은 마치 거대한 코로나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방어진지와 병영이 시설 주변을 감싸고 있다. 피라미드 모양 부속 건물의 그림자 안에 한 줄의 병영이 마치 묘비처럼 버티고 서 있다. 운하의 물이 칼슘염을 함유하고 있어, 콘크리트로 된 댐 표면에 납과 금으로 외피를 씌워 놓았다.


□해설


이것은 1976년 3월 19일 정찰 위성으로 찍은 사진으로, 미국이 최초로 획득한 '오벨리스크'의 자료였다. 전체 시설의 면적은 300㎢가 넘었다. 세 개의 호수는 적외선 촬영 결과 엄청난 고온의 액체로 가득했고, 높은 복사능 수치를 나타냈다. 세 점에서의 촬영을 통해, 주 시설인 오벨리스크의 높이가 110에서 130m 정도라는 것을 계산해낼 수 있었다. 무기로서의 기능과 실제 정황은 명확하지 않다.


코셰이는 소련 유적과학 연구의 꽃이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버려져 있었던 유적이 마침내 대명천지에 그 진가를 드러내었다. 소련은 코셰이에 대한 그 어떠한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다. 1991년 드레스덴 조약이 드레스덴 협약으로 개정된 이후, 러시아는 끝까지 관련 자료를 기밀해제하지 않고 코셰이의 철거를 시작하였다. 현재 우리가 파악한 정황과 OKb-37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를 종합하여, 과학원은 코셰이가 인간의 사고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시스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구체적인 작용 방식과 그 범위는 이제 알 방법이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코샤이 시스템이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그 어떤 유적무기보다 위협적이며, 방어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저지할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작동하기 전에 파괴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생각도 이와 같았다. ARPA와 스컹크 웍스는 1976년, 코셰이 시스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NB-70의 개발 계획안을 제출하였다. NB-39의 개발은 D1 빅토르-탱고의 유적 기계 연구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D51과 D9에서 얻은 기술도 활용되었다. NB-39 역시 현재 우리가 운용하는 공중항모의 원형이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Bugg-Shash-****-04-17>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영상


거대한 폭격기가 보인다. 버섯을 닮은 편구형의 포탑이 은빛의 칼처럼 기다란 기체 위로 튀어나와 있다. 유선형의 엔진실들이 같은 간격으로 기체 아래 붙어 있다. 네 개의 터빈 튜브가 각각의 반응로 커널을 감싸고 있다.


□해설


NAR.Cop.[각주:18] NB-70은 우리 전략항공대 최강의 무기이다. 8개의 P&W NP-4051 핵반응로를 두 개씩 묶은 4개조의 터보제트 엔진 덕분에, 전시대비 배치시에는 북극 빙반 상공을 계속 맴돌면서 명령대기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기체는 훈련과 시험을 위한 프로토타입이었다. 12기의 동형기가 15분 대기 태세를 갖추고 지상에서 대기 중이었다. NB-70은 덩치가 너무 커서, 한번 이륙하면 알래스카의 단 두 개의 비행장에만 착륙할 수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훈련기는 이륙한 지 벌써 9개월이 넘었지만 전혀 소모된 흔적이 없다.


□영상 전환


보잉727기 정도의 크기를 가진, 상어 모양의 물체가 커다란 발사관에서 낙하한다. 자그마한 델타익이 가른 공기를 못생긴 흡기구가 빨아들이고, 이윽고 점화된 로켓엔진이 맹렬한 화염을 뿜어내며 물체를 앞으로 밀어낸다.


□해설


이것은 '나바호' 미사일을 NB-70 전략폭격기 용으로 개조한 'XK-플루토'이다. 이 영상은 C-31 수송기로 운반된 실험탄의 실험 장면이었다. 실제 모델과 달리 실험탄은 개조 W68 각개목표설정탄두와 공격용 핵분열 램제트 엔진을 장착하지 않았다. 실제 전투에서라면 XK-플루토는 적의 영공을 마하3의 빠른 속도로 통과하여 지정된 목표마다 탄두를 뿌려댈 것이다. 탄두를 전부 투하한 후, 그것은 최후의 목표 위에서 핵분열 엔진의 노심을 사출하여, 적의 머리 위로 용해된 플루토늄을 끼얹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유적무기 경쟁이 극한으로 치달은 바로 그 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로, 1976년 인류는 고대 유적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종교인들에게 '천벌'이라 불리는 ELID 감염증의 첫 번째 병례가, 미국 관할의 남극 맥머도 관측기지 D1에서 나온 것이다. 최초의 감염자의 이름은 고먼 비닐론. 세 번의 '자유의 여신상' 계열 실험에 참여한 자였다. 최초로 증상이 확인된 것은 1976년 5월 30일, 제11 차 자유의 여신상 실험이며 고먼이 참여한 세 번째 유인 실험 도중이었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Byatis-****-05-30>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영상


물결이 소리없이 부둣가에 물결치고, 탐조등의 빛이 투명한 지하호수를 뚫고 들어가 바닥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빛은 얼마 안 가 호수물에 빨려들어 사라지고, 어둠으로 가득한 호수 바닥은 끝없는 심연을 연상시킨다. 한 무리의 해병대원이 플랫폼의 모서리에서 명령을 대기하고 있다. 손에 든 무기는 유달리 복잡해 보이는데, 총기와 촬영장비를 합친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플랫폼 한가운데의 잠수장을 응시하고 있다. 소형 잠수정 하나가 탐조등의 빛이 닿는 범위에 나타나고, 그 주변으로 수면이 물결치기 시작한다.


□해설


이것은 남극 빙반 아래의 D1 빅토르-탱고에서 진행된 제11차 '자유의 여신상'계열 실험이며, 계획 중 실행된 7번째 유인 실험이다. 실험은 보스토크 호수 바닥에서 발견된 '문'을 통해 소형 잠수정을 D2 로스 앨러모스의 같은 시설로 전송하는 것이었다. 앞서 이루어진 6회의 유인 실험 중 5회는 성공, 1회는 실패로 끝났다. 총 19명이 참가했으며 3명은 순직하였다. 현재 진행중인 제7 차 실험에서, 잠수정은 이미 '문'의 물리 영향 범위 밖으로 이탈하여 부상하였다.


□영상 전환


□사진 자료


고먼의 개인 약력. 병리학 자료, 병력, X레이 사진. 병상에 누워있는 사진.


□영상 자료


감압실 내부, 고먼이 병상에 누워 있다. 그의 피부 안쪽에서 청록색이 스며나오고 있다. 얼굴은 조금도 생기가 없는 연회색이다. 얼굴 피부에 검버섯이 피기 시작했으며, 호흡기가 그의 정상 호흡을 돕고 있었다. 환자감시장치에 표시되는 그의 그래프가 극히 불안정하다.


□해설


고먼 비닐론. 미 육군 그린베레 소속 기술하사. 이것은 그가 몸담은 '시프터'의 제17 차 임무였고, 이 역시 '자유의 여신상' 계열 실험의 제7 차 유인실험 임무였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 계열 실험에 3회 참가했으며, 앞선 2회의 실험 후엔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3차 임무가 끝난 뒤 감압실에서 실시한 신체 검사 결과, 고먼의 체내 단백질이 잡아먹히고 있었고 단백질 간의 분자 결합에도 손상이 있었으며, 전신의 결합조직이 모두 분해되어 있었다. 신체의 비정상적인 노화로 근육이 약해졌으며, 혈중 산소 농도가 낮아지고 적혈구 수량이 줄어들었다. 골격은 칼슘 응집이 심화되었으며, 골경도가 급속히 증가했다.


당시의 기술 한계로 인해 고먼 비닐론의 병세를 파악하기 어려웠고, 간단하게 방사능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실험 종료 61시간 후 고먼은 사망하였다. 당시 골경도는 400HB (N/㎟) 에 달하여, 이미 강철의 경도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고먼 비닐론은 A형 ED에 감염된 것이 명백했다. 유적에 장시간 접촉하였고, 비교적 긴 잠복기가 있었으며, 24~48시간 정도의 변형기에, 신체의 결합조직이 분해되고 단백질 분자결합이 끊어졌다. 하지만 고먼의 신체조건 때문에 그는 DNA사슬이 새롭게 재구성될 때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는 행운이라 할 수 없었다. 1980년까지 세계 각지의 ED 감염자 수는 15만 명을 넘어섰다. 그 중 ED Infected[각주:19]로 변형된 이들은 거의 1만에 가까웠다. 미국과 소련을 필두로 각국에서 ED를 억제하기 위한 실험이 벌어졌지만,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각 환자가 처한 상황이 모두 달라, ED Infected로 변형 후의 형태가 전부 제각각인 탓이었다. 이로 인해 통계학적 방법으로 얻은 데이터나 정보는 전투 중에 기본적으로 쓸모가 없었다. 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은 정예들을 모아 대 ED Infected 특수부대를 설립하기 시작했지만, 기술과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부대의 사망률은 지극히 높았다.


설상가상으로, ED의 감염 방식과 경로가 밝혀지지 않아 당시의 기술로는 ED를 치료하거나 예방할 방법이 없었다. 달리 말하면 감염자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1983년, 미·소 양국이 ED 백신 연구를 시작한 이후 점차 완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유적무기의 무시무시한 힘과 가능성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198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늪에 빠진 소련 측에서 최초로 유적무기를 실전에 투입하였다. 들뜬상태 (excited states) 의 '종복'이었다.


■영상 자료


경고: 본 영상 자료는 기밀 문서 <Chaugnar Faugn-****-03-19>와 관계된 것임. 관련 자료의 열람 권한이 없다면 즉시 물러나 소속 부대의 보안장교에게 보고할 것. 이를 위반시 총살형에 처할 수 있음. 60초 이내에 이행할 것.


□정지화면


아주 높은 상공, 아마도 위성궤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은 어느 작은 산속 촌락의 조감도이다. 가파른 절벽 아래에 한 무리의 오두막이 있고, 산양들이 주위에서 풀을 뜯고 있다.


두 번째 사진에선 무언가가 촌락 위를 굴러, 파괴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포격의 흔적 같지는 않다. 약 4m 너비의 정체불명의 물체가, 촌락이 있는 암반지대를 고열로 짓누른 것처럼 반들반들하게 깎아내고 지나갔다. 어떤 집은 일부분이 기울어져 있고, 나머지 부분은 깔끔하게 도려내어졌다. 백골이 그 부근에서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고, 심지어 시체를 먹으러 온 대머리독수리마저 없었다.


□해설


이것은 1981년 1월, KH-11 인공위성이 공전 중에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의 간격은 89분이다. 이 촌락은 이슬람 지하드의 중요 인물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흔적들을 자세히 보면 1962년 열병식 때 수레가 남겼던 흔적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폭 4m짜리 흔적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종복' 부대를 투입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행경로 상의 유기물을 완전 분해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기까지 5천 초 미만의 시간이 걸렸다.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결과를 만들어낸 것들은 두 번째 사진이 촬영될 때에 이미 이탈한 후였다. 이 촌락은 대전차로켓이나 중구경 화포는 없었으나 대구경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이 물체는 단 한 번도 진행 경로를 바꾼 흔적이 없었으며, 경로 내에 있던 인원은 전부 소실되었다. 깔끔하게 살이 발라진 해골 외에는 사람이 거주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 결정적인 증거가 가리키는 유일한 결론은, 소련이 카이베르 산 어귀에 들뜬상태의 종복 부대를 배치했다는 것이었다. NATO 연합군 사령부에서 도출한 결론으로는, 당시의 장비 조건하에서 NATO의 기갑부대는 전술핵의 지원 없이 들뜬상태의 종복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1981년, ED 감염자는 여전히 손 쓸 방도 없이 늘어나기만 했다. "1976년 첫 사례가 보고된 이후로 1980년까지 발견된 감염자 수가 15만 명이었는데, 1981년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새로 감염된 환자만 5만 명이었다."[각주:20] 동시에 ED-Infected로의 변형률도 상승하였다. 1980년에서 1981년까지 새로 나타난 5만 건의 병례 중, ED-Infected로 변형된 수는 그 10% 이상인 5천여 명에 육박했다. 신종 돌연변이 개체의 종류도 계속해서 늘어났다. 더 중요한 것은, 엄청난 인력과 자본을 투입했음에도 치료법 연구에 아무런 진전이 없어, 이를 손 놓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당시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 역시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바티칸과 세계보건기구의 주선으로 미·소 양국은 드레스덴에서 처음으로 비밀리에 양자회담을 가졌다. 회담 중 미·소 쌍방이 처음으로 유적과 유적 무기의 문제에 대해 정보를 교환했고, 더불어 ED 확산 방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1981년 11월 3일, 미·소 양국이 드레스덴 조약에 조인했다. 양국은 유적 연구 및 유적 무기의 군사 배치를 일절 중단하고, 이미 배치된 유적무기 역시 해체하기로 했다. 이 조약은 1991년 이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드레스덴 협약'으로 발전했으며, 이후의 1세기 동안 우리의 유적에 대한 기본 태도를 정립한 조약이었다.




Part 2. 후 유적 시대와 드레스덴 조약 이후


- 참고문헌


■일반 보고서


□전 UN 아시아 군관구 육군 제3 군 특수작전대대 보고서


□<강총병의 정글전과 시가전에 대한 개요와 실험보고>



■모스크바 전역에서 노획한 문건 (2080년 3월~6월)


□<강총병 시리즈의 인공배체 실험 계획과 조작 프로세스> (페이지 유실)


□<인공적으로 유발된 유전자배체와 관련기술에 대하여> (페이지 유실)


□<강총병과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인터페이스> (모스크바 레닌 도서관 박사논문집, 니콜라이 폰 슈첸버그)



■제국호 (SMS Kaiserreich) 제3 컨테이너에서 인양한 문건


□<Type 1과 Type 2의 배양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요구사양>


□<Type 1에 대한 부연설명>

  1. 소련 특별전리품위원회, 반은 약탈조직이나 다름없는 이것은 게오르기 말렌코프, 니콜라이 불가닌,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 등, 사실상 당시 소련 중앙당의 최정예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GKO 주석 조제프 스탈린의 직접 지시를 받았다. 소련 체제 하에서 이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조직이 비효율적으로 움직이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본문으로]
  2. 제3 제국은 존속기간 동안 세 개의 유적을 발견하였고, Urkunde01, 02, 03으로 명명하였다. [본문으로]
  3. NKVD (내무인민위원회) 에 따르면, 멩겔레 박사는 1945년부터 49년까지 소련 측과 광범위한 '합작'을 했으며, 1949년 소련은 멩겔레 박사가 남미로 도피할 수 있도록 동독 정부를 통해 자금을 지원하였다. [본문으로]
  4. 타바샤르B, 소련의 1급 기밀 설비 시험장. 1948년 기공되어 1950년 완공과 동시에 NATO에 의해 '불가사리'라 불린 정체불명의 시설이 배치되었다. 구체적인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본문으로]
  5. D1은 미국 정부가 처음으로 장악한 유적으로, 1955년 발견되었다. 1957년 시프터의 설립 이후 빅토르-탱고로 개명되었다. [본문으로]
  6. 연합정부의 성립 이전, 미국 정부는 이 조직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공개하지 않았으며, 이 조직의 존재를 언급하는 어떠한 공문서도 남기지 않았다 [본문으로]
  7. OKb는 러시아어로 '설계국'을 의미하는 키릴문자 'Опытное конструкторскоебюро'의 축약어이다. 라틴어로는 'Opytnoe Konstructorskoe Byuro'로 번역된다. 소련은 냉전 기간 동안 설계국을 유적의 발굴과 연구작업을 감추는 데 사용하였다. [본문으로]
  8. ARPA가 연구작업을 넘겨받은 후, 시프터의 역할은 정보수집과 작전부문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 시프터는 여전히 유적 관련 최고위 연구기관이었다. [본문으로]
  9. 미국 국방부에는 총 16개의 전속 연구국이 있었지만, ARPA는 그 중 유일하게 국방부 장관의 직속 기관이었다. [본문으로]
  10. 'BOOJUM'은 루이스 캐럴의 시 <스나크 사냥>에 등장하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허구의 생물이다. 이 생물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작가 본인조차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시프터가 부여한 암호명으로, 정식 명칭은 UMU-1 (Unknown Military Unit-1) 이다. [본문으로]
  11. 시프터 지휘관 *** 하인츠, 1961년 대통령 집무실에서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발췌. [본문으로]
  12. PGM-11 레드스톤 미사일은 핵탄두를 탑재하고 325km를 날아갈 수 있는 미 육군 최초의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다. 1958년 비밀리에 서독과 터키에 배치되었고, 이후 모델 넘버 M8까지 개량되었다. [본문으로]
  13. 실제로 우리가 모스크바 전역 이후 확보한 증거에 따르면, 소련은 1965년이 되어서야 타바샤르B 시설에서 양산 단계에 진입하였고, 1971년에야 종복을 병기화하여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본문으로]
  14. M.J.실츠비아. 여성. 소련 국적. 1940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55년 국립 로모노소프 대학 수학과에 입학. 1957년 KGB 16국에 흡수되어 유적 연구팀에 합류. 1966년 유적의 기능에 따른 분류법을 제안. 1971년 종복의 무기화 작업을 지휘. 1981년 소련 측의 수석 과학관으로 드레스덴 조약 서명에 참여. 1983년 A형 ED감염증의 백신 연구에 참여. 유적 연구 분야에 남긴 탁월한 공적을 인정받아 '유적의 어머니' 라 불림. [본문으로]
  15. M.J.실츠비아의 일기에서 인용 (1971년 1월 13일) [본문으로]
  16. ELID, Euroky Low-Emission Infectious Disease, 광역성저복사감염증. 유적 연구와 개발의 부산물로 나타났다. 감염방식과 경로 모두 불명확하며, 치사율은 극히 높다. [본문으로]
  17. A형 ED, 로버트 아이첼버거 박사가 2060년 제출한 의 서술에 따르면, "A형 ED가 모든 ED감염증의 기원이지만, 지금까지 A형 ED감염증의 치료 방법은 여전히 불명확하다." [본문으로]
  18. NAR.Cop., North American Rockwell Corporation, 노스아메리칸 록웰 사. NB-70의 주 제조사이다. [본문으로]
  19. ED Infected. 특수한 ED 감염자로 감염 이후 유전자의 재구성이 이루어지며, 신체조직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 이성을 상실하고 공격성이 극히 높아진다. 환자의 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유전자가 재구성되는 방식도 전부 다르며, 이것이 ED Infected 각 개체의 차이를 낳는다. [본문으로]
  20. 로버트 아이첼버거 박사, , 2060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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